일상다반사

2차 이산 가족 상봉, 북한에 내 외삼촌이 살아계시다니...

Mind Hunter 2018. 8. 2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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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산 가족 상봉, 북한에 내 외삼촌이 살아계시다니...

210개월 만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재개되었다. 

 

남북한 화해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강한 촛불 대통령, 문재인 정부 덕분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 어떤 정부보다 이번 정부는 북한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실, 지난 두 번의 정부는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길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해 나가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숙명인 통일, 이산가족의 인권 등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던 지난 9년을 되돌아보면,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내 어머니도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북에 계신 친오빠를 만날 수 있었다. 얼핏 1980년대 초반 여의도에서 이산가족 찾기 행사 때 잠깐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같다는 내 기억은 있지만, 평생을 사시면서 북한에 오빠가 있다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많은 이산가족 중에 상봉 신청을 하여도 경쟁률이 높아 매 번 거절당하신 분들 많은데, 내 어머니는 오히려 북에 계신 오빠가 상봉 신청하여 가족의 생사가 서로 확인되고 초대받은 2차 상봉자 가족에 포함되셨다. 아직도 가족을 그리워할 다른 이산가족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운이 좋은 경우였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보이스 피싱으로 여기셨다. 서대문 경찰서라고 연락이 와서 이것저것 질문을 받았을 때 보이스 피싱이 아닌가 생각하여 다른 형제분들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원 조회는 경찰에서 담당하기 때문에 분단 전에 살았던 서울 서대문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본인 포함하여 5명의 가족이 참석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보호자인 내 동생을 포함하여 4(어머니, 어머니 여동생, 어머니 남동생, 아들)이 신청하였다. 내게도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나도 바로 신청을 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늦게 알게 되어 적십자사에 연락을 했지만 이미 신원 조회가 끝나 추가 접수가 불가능하여 북한 땅 금강산을 밟아볼 기회를 놓쳤다 

 

북에는 어머니의 오빠, 내게는 외삼촌 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은 통일이 되거나 자유롭게 왕래가 되는 때가 되면 내가 밟을 북한 땅이 있고,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혈육이 지금은 갈 수 없는 그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이 사실은 내 마음을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게 한다. 피부로 직접 느끼지 못했던 통일에 대한 열망을 구체적으로 내게 다시 일깨워 준다. 하나님이 북한 땅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그 날을 준비하게 하신다. 

 

이번 2차 상봉은 북에서 초청한 이산가족 상봉이기 때문에 2차로 진행되었다. 2018. 8. 23()에 속초의 한화리조트에 집결하여 사전 교육과 건강 검진을 받은 후 하루 뒷날인 8. 24()에 단체 버스를 타고 경계를 넘어 상봉 장소 금강산에 도달했다. 휴대폰은 가져가지 못하고 카메라는 소지가 가능했다. (망원 렌즈는 불허) 

 

가기 전, 어머니는 북에 계신 오빠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데 난, 아들로서 겨울에 입으실 패딩을 마련해서 선물했고 어머니는 속옷과 커피 믹스, 양말 등을 마련하셨다. 커피 믹스의 경우 북한 중산층에서 인기 있는 아이템이라고 한다. 수화물 여행용 캐리어에 선물을 가득 채웠다 

 

북한 땅으로 넘어가시기 전에 내게 문자로 금강산으로 출발하시는 문자를 보내셨고 다시 남한 땅으로 오시기 전까지는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TV에 비칠까봐 뉴스를 자주 보았지만 주목받지 못한 사연이라서 유튜브 동영상에서야 우리 가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상에서 처음 뵙는 북에 살고 계신 외삼촌은 오래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많이 닮으셨다. 외삼촌 형제 분 중에 제일 많이 닮으신 것 같았다. 외삼촌이 가족들과 이별하게 된 사연은 서울에 살고 계시다가 큰 형과 함께 둘이서만 북한 땅에 잠깐 놀러갔는데, 큰 형은 혼자서 서울 집으로 돌아오고 동생인 이 분은 전쟁이 나서 그대로 눌러 앉게 되었다고 한다. 19506.25때 이 외삼촌은 약 13살 정도였을 텐데 아버지, 어머니 다른 모든 형제들과 떨어져 홀로 북한 땅에 남겨져 얼마나 서럽게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아왔을지 짐작이 간다. 이 외삼촌은 남한의 형제들을 만났을 때 제일 궁금했던 것은 그 당시 헤어졌던 형의 생사가 지금까지도 궁금했다고 한다. 그 분도 형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모든 형제들도 그 분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형은 여태까지 잘 살아 계시다가 약 3년 전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작은 외삼촌, 이모는 혹시라도 못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기우였다고 한다. 보자마자 아버지 모습과 똑같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 어머니 성함을 서로 물어보며 맞춰보려고 했는데 겉모습만 보고 바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한다 

 

작은 외삼촌은 평양에서 사시고, 군 생활을 38년 정도하셨고, 10살 적은 부인이 있으며, 슬하에 두 아들이 있고, 그 두 아들 중 불행하게도 맏이는 먼저 저 세상에 보냈다고 한다. 또 말씀을 하실 때, 위대한 수령 동지 덕분에……. 이런 말을 쓰신다고 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갔던 내 동생이 큰 절을 올리려고 했을 때도 큰 절은 명절 때 수령 동지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마다하셨다고 하는데 아마 당성이 높은 사람들,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가 있는 사람들을 북한 정부가 선정했던 것 같다. 우리 측 가족은 가족 당 5명 정도로 참석했지만 북한 측 가족은 여러 명이 오지 않고 보통 1명만 상봉장에 왔다고 한다. 통일이 되더라도 남과 북의 생각과 사상이 하나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3일째 마지막 날, 작별 상봉 때는 마지막 점심을 같이하고 헤어지는 시간이었는데 어머니는 이별이 너무 아쉬워 점심을 거의 못 드셨다. 북한으로 돌아가셔야 할 오빠 분도 거의 수저를 들지 못했다고 하셨다. 살아 생전 다시 만나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때문에 밥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생사가 확인된 이산가족들 만이라도 정부의 허가를 통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조속히 남북한 양측이 통 큰 결정을 내려줘야만 할 것이다. 

 

 

다시 남한 땅으로 경계를 넘어섰을 때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하셨고 상봉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오빠에 대해 낱낱이 내게 말씀해 주셨다. 며칠 동안 가슴 졸이며 이번 상봉 행사를 주시했던 나도, 비록 참석은 못했지만 북한에 외삼촌, 외사촌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다. 더욱 통일을 기대하며 작은 손길 보태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처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통일을 준비하는 꿈꾸는 세대가 되고 싶다. 내 자녀들에게는 통일 대한민국을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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